「양자역학 첫걸음」에서 만난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물리 문제이면서 동시에 아주 오래된 철학 질문이기도 합니다. 아래 두 편의 짧은 글을 읽고, 각자 생각을 정리한 뒤 함께 토론해 보세요. 정답이 하나로 정해진 질문이 아니라, 과학자들도 100년 가까이 계속 다투고 있는 질문입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본다고 해서 그 대상이 바뀌지는 않는다"고 당연하게 생각한다. 책상 위의 컵은 내가 보든 안 보든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다. 그런데 아주 작은 세계, 원자나 전자의 세계로 들어가면 이 당연한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관측하기 전까지 전자는 "여기 있다"거나 "저기 있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없고, 여러 가능성이 동시에 겹쳐 있는 상태로 다뤄야만 실험 결과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 그러다 누군가 측정하는 순간, 그 겹쳐 있던 가능성들 중 하나로 결과가 딱 정해진다.

1935년,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슈뢰딩거는 이 이상한 상황을 널리 알려진 표준 해석(코펜하겐 해석)에 대한 비판으로 유명한 사고실험을 제안했다. 밀폐된 상자 안에 고양이와 방사성 물질, 그리고 이 물질이 붕괴하면 작동하는 장치를 함께 넣는다. 원자 하나가 언제 붕괴할지는 확률로만 말할 수 있으므로, 표준 해석을 그대로 적용하면 상자를 열기 전까지 고양이는 "살아있는 상태"와 "그렇지 않은 상태"가 겹쳐 있다고 말해야 한다. 슈뢰딩거는 이것이 터무니없다고 지적하고 싶었다 — 원자 하나의 애매함이 고양이 한 마리의 생사라는, 눈으로 확인 가능한 크기의 애매함으로 그대로 번져도 되는가?

흥미로운 점은, 이 사고실험이 나온 지 9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물리학자들 사이에 완전히 합의된 답이 없다는 것이다. "관측하는 순간 실제로 하나의 상태로 정해진다"고 보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사실은 모든 가능성이 각자 다른 세계로 갈라져 나가며 실현된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같은 실험 결과를 두고 이렇게 다른 이야기가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가 "무엇이 진짜로 일어난 일인가"를 묻는 것과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 서로 다른 질문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덧붙여 — 관측하기 전 전자가 "여러 위치에 동시에 겹쳐 있다"는 말은 비유가 아니라, 실험 결과를 설명하려면 반드시 그렇게 다뤄야 한다는 뜻이다. 오른쪽 그림처럼 하나의 알갱이가 여러 자리에 반투명하게 겹쳐 있는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안다"는 말에는 사실 두 가지 다른 뜻이 섞여 있다. 하나는 "그것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가"를 아는 것(존재론적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확인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인식론적 질문)이다. 평소에는 이 둘이 거의 같은 것처럼 느껴진다. 컵이 책상 위에 있다는 사실과, 내가 컵이 책상 위에 있다고 아는 것은 보통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자역학은 이 둘이 반드시 같지는 않다는 것을 아주 정밀한 실험으로 보여준 첫 번째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구분은 물리학 밖에서도 낯설지 않다. 우리는 누군가를 딱 한 번, 아주 짧은 순간 보고 나서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라고 판단해 버릴 때가 있다. 그 판단은 그 사람의 "진짜 모습 전체"일까, 아니면 내가 우연히 관측한 "그 순간의 한 단면"일 뿐일까? 과학자들이 어렵게 익히는 태도 중 하나는, 충분한 근거가 없을 때 "아직 모른다"고 인정하고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다. 이 태도는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모른다"고 말할 용기와 "안다고 착각"하는 것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