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의 동의는 어떤 진리를 보장하는 듯해 보이고 따라서 그 자체로 권위를 지니는 것이 사실이지만 다수의 지지를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진정 이성적이고 바람직하다는 보장은 없다고 하며 시작합니다. 스피노자는 진리를 하나의 존재로 파악했기에 개인적인 체험을 중시했는데 이 경우에도 다수의 동의가 진리 획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볼 수 있다고 하며 그렇지만 절대적이고 영원한 규범으로서의 진리를 아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라고 묻고, 패러다임을 결정하는 받아들이는 것은 연구자 단체에서 결정하게 되는데 연구자들은 대답을 찾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과학이론은 진리로 받아들이고 발전시키게 되는데 그렇다면 이 경우 다수의 동의란 진리의 기준이라기 보다는 효율성과 이론의 생산성에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문화에 따라 진리가 변화한다는 것은 결국 진리가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며 집결한 다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여론을 형성하여 큰 권력을 행사하는데 이때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수도 있지만 다수의 어리석음이 어떤 폭력을 낳았으며 이에 반대하는 소수의 저항이 어떻게 무시되었는지 역사 속에서 자주 목격되었다고 하고, 여론은 선입견이나 감정에 근거하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사람들은 다수와 함께 있다는 큰 안도감 때문에 여론에 유혹되고, 다수의 의견은 권력체제에 의해 선동되고 조종될 것이므로 실질적인 개인의 자유는 상당 부분 제한될 위험이 있다고 합니다.
또, 실제로 지도자의 임무가 국가를 발전시키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라면 정치가는 때로는 여론에 이끌려가기 보다는 여론을 주도해야하는데 여기서 문제점은 다른 시민들보다 더 선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권력욕에 빠지지 않고 모두에게 공정한 철인왕이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것이라고 하며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철학사적으로 볼 때 '여론'이나 다수의 의견은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지만 현대적 정치의식은 플라톤의 의무분배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소수의 대중으로부터 모든 권력을 앗아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고, 법이 강자와 소수의 특권층에 의해 남용되거나 빗나가지 않기 위해선 일반의지의 실행은 필수적이라고 하며 다수에 의해 정치형태가 결정될 때 폭력과 불의도 사라질 것이라는 것도 이같은 관점에서라고 합니다.
또한, 법이 채택되는 과정에서 소수의 의견이 수용되지 못하는 것을 피할 수 없지만 루소는 채택된 법에 반대하는 이들도 그것에 복종함으로써만이 그들의 자유를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하며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은 모든 시민을 존중할 것을 강조하는 민주주의의 이상과 일치하는데 민주주의의 위험도 존재하지만 현실적인 최선의 선택임을 부인할 수 없다고 하고, 효율성의 문제와 진리의 문제는 별개의 것이지만 여론이 보다 바람직한 시민의 힘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일반시민 각자가 권력기구의 구체적 실행에 대한 보다 많은 정보를 갖고 그에대한 항구적인 관심과 비판의식을 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민주주의가 다수의 동의를 기반으로 하는 이상 우리는 절대적 진리에 너무 집착하기보다는 다수의 동의가 보다 정의롭고 평화적인 결론에 이를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한다고 합니다. 저는, 옛날에 다수의 사람들이 우주의 중심이 지구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것처럼 무조건 다수의 의견이 진리라고 할순 없지만, 책에서 말한것처럼 다수의 동의가 정의롭고 평화적인 결론에 이를수 있도록 노력하고, 또한, 정치가가 옳은 선택을 하지 못하거나 무자비한 통치를 한다면 그때 비판할 수 있는 다수가 될수 있도록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수의 동의는 어떤 진리를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 자체로 권위를 지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다수의 지지를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이성적이고 바람직함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스피노자는 진리를 하나의 실재로 파악하며 개인적인 체험을 중시했는데, 이 관점에서도 다수의 동의는 진리 획득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절대적이고 영원한 규범으로서의 진리를 아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무엇을 진리로 받아들일지를 결정하는 패러다임은 결국 연구자 집단이 정하게 되는데, 연구자들은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이론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발전시켜 나간다. 그렇다면 이 경우 다수의 동의란 진리의 기준이라기보다는 효율성과 이론의 생산성에 관련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문화에 따라 진리가 변화한다는 것은 결국 진리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집결한 다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여론을 형성하여 큰 권력을 행사하는데, 이는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다수의 어리석음이 폭력을 낳고 이에 반대하는 소수의 저항이 무시되었던 사례를 역사 속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다. 여론은 선입견이나 감정에 근거하는 경우가 많고, 사람들은 다수와 함께 있다는 안도감 때문에 쉽게 여론에 휩쓸린다. 다수의 의견은 권력 체제에 의해 선동·조종될 수 있으므로, 실질적인 개인의 자유가 상당 부분 제한될 위험도 있다.
실제로 지도자의 임무가 국가를 발전시키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라면, 정치가는 때로 여론에 이끌려가기보다 여론을 주도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다른 시민들보다 선(善)을 더 잘 알고, 권력욕에 빠지지 않으며, 모두에게 공정한 '철인왕'이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점이다. 철학사적으로 볼 때 '여론'이나 다수의 의견은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 왔지만, 현대의 정치의식은 플라톤식의 역할 분배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소수가 대중으로부터 모든 권력을 빼앗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법이 강자와 소수 특권층에 의해 남용되거나 왜곡되지 않으려면 일반의지의 실행이 필수적이며, 다수에 의해 정치 형태가 결정될 때 폭력과 불의도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 역시 같은 맥락에서 나온다.
또한 법이 채택되는 과정에서 소수의 의견이 온전히 수용되지 못하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 루소는 채택된 법에 반대하는 이들조차 그 법에 복종함으로써만 자신의 자유를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은 모든 시민을 존중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이상과 맞닿아 있으며, 민주주의에 위험이 존재함에도 현실적으로는 최선의 선택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효율성의 문제와 진리의 문제는 별개이지만, 여론이 더 바람직한 시민의 힘으로 자리 잡으려면 시민 각자가 권력 기구의 구체적인 실행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갖추고, 이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비판 의식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민주주의가 다수의 동의를 기반으로 하는 이상 우리는 절대적 진리에 지나치게 집착하기보다, 다수의 동의가 더 정의롭고 평화적인 결론에 이를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옛날에는 많은 사람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었던 것처럼, 다수의 의견이 무조건 진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책에서 말한 것처럼 다수의 동의가 정의롭고 평화적인 결론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하며, 정치가가 옳은 선택을 하지 못하거나 무자비한 통치를 한다면 그때는 이를 비판할 수 있는 깨어 있는 다수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