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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나은 학생 글

최근 논술 글 3편입니다. 손글씨 원문과, 문맥·맞춤법을 다듬은 교정본을 나란히 볼 수 있습니다.

원문(다듬기 전)과 교정본(다듬은 후)을 함께 실어, 어떤 표현이 어떻게 다듬어졌는지 비교하며 읽을 수 있게 했습니다.

1 · 작성일 25.12.19

오늘날에도 철학은 가치가 있는가?

다듬기 전 · 원문

현대 사회에는 생산성과 기술적 경쟁적 승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철학적 사고의 특징은 숙고와 신중함이므로 모든 것이 빠삐 돌아가는 현대생활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철학은 가치가 있는가?

철학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효율성과 생산을 숭배하는 문화 속에서 철학적 사고는 더욱 더 절실하다. 왜냐하면 기술의 발전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끊임없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과학주의자들은 자유 의지, 세계의 시초, 영혼의 불멸과 관련된 질문까지 과학이 해명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과학은 수많은 분야에서 해결책을 제시함과 동시에 새로운 문제를 유발하고 있다. 과학은 반성작업을 통해 연구의 한계를 스스로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따라서 철학은 과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할 수 있는 방향을 제공해 줄 의무를 갖는다. 과학 한없이 많은 것을 제공해 줄 수는 있지만 그것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하고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철학적 사유이다.

마르크스는 명상만 하는 철학자들의 모습을 비판하고 영원한 진리를 탐구하는 형이상학을 인간의 혁명을 추구하는 역사학으로 대치시켰다. 그는 인류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만을 제기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히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기에 자신이 해결할 수 없고 과학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들을 끊임없이 제기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형이상학적인 동물이며 형이상학은 인간에게 약속할 수 없는 유혹이다.

철학에 있어 과학과 한계를 구분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 철학은 지혜와 진리의 추구라고 성의한다면 철학은 시대를 갖고 있지 않으며 인간이 이성과 의식을 갖고 있는 한 계속될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 우리가 철학 없이 살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철학은 우리가 더 잘 살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즉, 철학은 우리가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가치가 있는 것이다.

+기술과 과학이 맹위를 떨치는 오늘날 철학의 위치가 많이 위축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성과 풍부하고 과학적 지식이 효율적이라 해도 그것이 자사와 삶의 목적, 그 자체를 실문하는 철학을 대신할 수 없다.

선생님과 함께 다듬은 글 · 교정본

현대 사회는 생산성과 기술적 경쟁력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철학적 사고의 특징은 숙고와 신중함이므로 모든 것이 바삐 돌아가는 현대생활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철학은 가치가 있는가?

철학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효율성과 생산성을 숭배하는 문화 속에서 철학적 사고는 더욱더 절실하다. 왜냐하면 기술의 발전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끊임없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과학주의자들은 자유의지, 세계의 시초, 영혼의 불멸과 관련된 질문까지 과학이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과학은 수많은 분야에서 해결책을 제시함과 동시에 새로운 문제를 유발하고 있다. 과학은 반성 작업을 통해 연구의 한계를 스스로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따라서 철학은 과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할 수 있는 방향을 제공해 줄 의무를 갖는다. 과학은 삶에 답을 줄 수는 없지만, 그것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하고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철학적 사유이다.

마르크스는 명상만 하는 철학자들의 모습을 비판하고 영원한 진리를 탐구하는 형이상학을 인간의 혁명을 추구하는 역사학으로 대치시켰다. 그는 인류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만을 제기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히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기에 자신이 해결할 수 없고 과학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들을 끊임없이 제기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형이상학적인 동물이며 형이상학은 인간에게 약속할 수 없는 유혹이다.

철학에 있어 과학의 한계를 구분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 철학을 지혜와 진리의 추구라고 정의한다면 철학은 시대를 갖고 있지 않으며 인간이 이성과 의식을 갖고 있는 한 계속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철학 없이 살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철학은 우리가 더 잘 살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즉, 철학은 우리가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가치가 있는 것이다.

기술과 과학이 맹위를 떨치는 오늘날 철학의 위치가 많이 위축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성과가 풍부하고 과학적 지식이 효율적이라 해도, 그것이 삶과 그 목적 자체를 묻는 철학을 대신할 수는 없다.

2 · 작성일 25.01.30

노동은 자아실현에 필요하다

다듬기 전 · 원문

고대 노예의 일하는 모습과 공장에서 일하는 현대 노동자의 모습을 보면서 노동을 자유와 연관지어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노동은 정신적·육체적 구속을 의미해 마련이다. 노동이란 말의 어원은 속박과 고문이다. 어원적으로 일은 지겹고 고통스런 활동을 지칭한다. 프랑스어로는 노동을 travail라 하며, travail의 어원은 사나운 황소나 말의 발바닥에 편자를 박을 때 소와 말을 묶어두는 기구, 즉 다루기 힘든 동물을 속박하기 위해 만든 라틴어의 tri-pilium에서 유래한다.

결국 본래의 의미에서 볼 때, 노동이란 냉혹한 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통스런 노력을 해야 하는 인간의 노예상태와 연관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자연의 적대적인 힘을 정복하고 그것을 인간의 수단으로 바꾸는 것도 노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자연 속에서 인간은 이방인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노동을 해야 한다. 즉, 노동은 처음에는 자연이 충족시켜 줄 수 없는 욕구들을 채우기 위한 생존수단이었지만 이후 자연뿐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를 바꾸는 역할을 하게 온다.

집단적인 측면에서는 물론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도 노동을 거치지 않고 얻은 성과는 결코 자아실현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따라서 노동 없이는 자아실현이 불가능하고, 노동이 있어야만 자아실현이 가능하다. 처음 이 글의 제목인 '노동은 자아실현에 필요하다'라는 제목을 보고 노동과 자아실현이 무슨 상관인지 잘 몰랐다. 그러나 책을 읽어보니 노동은 나의 잠재력을 발휘하며 자아를 실현하는 방법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노동은 인간이 하는 경제 활동이다. 공부란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다. 이 노동과 공부 사이에 과연 공통점이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공통점은 무언가를 배우고 익히고, 그리고 생각하는 것인 것 같다. 노동과 공부 모두 배워야 할 수 있고, 익혀야 하고, 생각하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점에서는 모두 같다고 볼 수 있다.

선생님과 함께 다듬은 글 · 교정본

고대 노예의 일하는 모습과 공장에서 일하는 현대 노동자의 모습을 보면서 노동을 자유와 연관 지어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노동은 정신적·육체적 구속을 의미하기 마련이다. 노동이란 말의 어원은 속박과 고문이다. 어원적으로 일은 지겹고 고통스러운 활동을 지칭한다. 프랑스어로는 노동을 travail라 하며, travail의 어원은 사나운 황소나 말의 발바닥에 편자를 박을 때 소와 말을 묶어놓는 기구, 즉 다루기 힘든 동물을 속박하기 위해 만든 라틴어의 tri-palium에서 유래한다.

결국 본래의 의미에서 볼 때, 노동이란 냉혹한 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통스러운 노력을 해야 하는 인간의 예속 상태와 연결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자연의 적대적인 힘을 정복하고 그것을 인간의 수단으로 바꾸는 것도 노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자연 속에서 인간은 이방인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노동을 해야 한다. 즉, 노동은 처음에는 자연이 충족시켜 줄 수 없는 욕구들을 채우기 위한 생존 수단이었지만 이후 자연뿐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를 바꾸는 역할을 하게 된다.

집단적인 측면에서는 물론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도 노동을 거치지 않고 얻은 성과는 결코 자아실현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따라서 노동 없이는 자아실현이 불가능하고, 노동이 있어야만 자아실현이 가능하다. 처음 이 글의 제목인 '노동은 자아실현에 필요하다'라는 제목을 보고 노동과 자아실현이 무슨 상관인지 잘 몰랐다. 그러나 책을 읽어보니 노동은 나의 잠재력을 발휘하여 자아를 실현하는 방법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노동은 인간이 하는 경제 활동이다. 공부란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다. 이 노동과 공부 사이에 과연 공통점이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공통점은 무언가를 배우고 익히고, 그리고 생각하는 것인 것 같다. 노동과 공부 모두 배워야 할 수 있고, 익혀야 하고, 생각하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점에서는 모두 같다고 볼 수 있다.

3 · 작성일 25.02.13

우리에게 복수할 권리가 있는가?

다듬기 전 · 원문

복수를 한다는 것은 타인이 저지른 잘못이나 범죄에 대한 죗값을 치르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복수란 이유없는 단순한 폭력이 아니며 상대방이 내게 행한 나쁜 것을 되돌려줌으로써 균형을 되찾고 스스로 정의의 이름으로 형벌을 내리겠다는 의도를 내포한다. 내가 당한 것과 똑같은 피해를 상대방에게 입힘으로써 보상받을 수 있다는 마음이 복수에는 내포되어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정의로운 처벌과 복수는 겉으로 보기엔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복수를 하는 것이 정의로운 행위를 하는 것이라 착각하기 쉽다. 왜냐하면 정의와 복수를 유사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처벌이란 개념 때문일 것이고, 실제로 이 처벌의 문제에 있어 정의와 복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적 차원에서 처벌이 이루어지느냐 아니냐에 따라 가해자에 대한 동일한 처벌이 최선의 법이 될 수도 있고 끔찍한 범죄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복수와 합법적인 처벌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첫째, 개인의 만족감. 둘째, 죄와 벌 사이의 시간적 간격. 이 두 가지를 기준을 통해 복수와 합법적인 처벌은 구분된다. 복수는 주로 육체적인 힘을 사용하는 데 반해 법은 합법적인 계율을 적용한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복수의 정신은 근본적으로 폭력적이다. 반면 법은 복수할 수 있는 적당한 권리를 제공하지만 그 이상은 금지함으로써 상호 폭력을 한정한다.

자신이 먼저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혔다 해도 상대방의 복수에 의해 자신이 흘린 피를 당연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없다. 따라서 그로부터 끝없는 새로운 갈등과 폭력이 시작된다. 즉, 복수는 끊임없이 새로운 복수를 만들어내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는 반복과 악순환의 구조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것에 한계를 짓는 자가 필요한데 이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법이다.

한편 용서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용서는 수행과정으로 여겨질 만큼 어려운 과제일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우리에게 복수할 권리가 없다고 본다. 복수를 한다 해서 이미 우리에게 생긴 상처는 나아지지 않는다. 마음의 정의인 용서를 통해 이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할 때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선생님과 함께 다듬은 글 · 교정본

복수를 한다는 것은 타인이 저지른 잘못이나 범죄에 대한 죗값을 치르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복수란 이유 없는 단순한 폭력이 아니며 상대방이 내게 행한 나쁜 짓을 되돌려줌으로써 균형을 되찾고 스스로 정의의 이름으로 형벌을 내리겠다는 의도를 내포한다. 내가 당한 것과 똑같은 피해를 상대방에게 입힘으로써 보상받을 수 있다는 마음이 복수에는 내포되어 있다.

외관상 정의로운 처벌과 복수는 겉으로 보기엔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복수를 하는 것이 정의로운 행위를 하는 것이라 착각하기 쉽다. 왜냐하면 정의와 복수를 유사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처벌이란 개념 때문일 것이고, 실제로 이 처벌의 문제에 있어 정의와 복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적 차원에서 처벌이 이루어지느냐 아니냐에 따라 가해자에 대한 동일한 처벌이 의로운 법이 될 수도 있고 끔찍한 범죄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복수와 합법적인 처벌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첫째, 개인의 만족감. 둘째, 죄와 벌 사이의 시간적 간격. 이 두 가지 기준을 통해 복수와 합법적인 처벌은 구분된다. 복수는 주로 무력적인 힘을 사용하는 데 반해 법은 합법적인 제한을 적용한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복수의 정신은 근본적으로 폭력적이다. 반면 법은 복수할 수 있는 적당한 권리를 제공하지만 그 이상은 금지함으로써 상호 폭력을 한정한다.

자신이 먼저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혔다 해도 상대방의 복수에 의해 자신이 흘린 피를 당연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없다. 따라서 그로부터 끝없는 새로운 갈등과 폭력이 시작된다. 즉, 복수는 끊임없이 새로운 복수를 만들어내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는 반복과 악순환의 구조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것에 한계를 짓는 자가 필요한데 이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법이다.

한편 용서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용서는 수양과정으로 여겨질 만큼 어려운 과제일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우리에게 복수할 권리가 없다고 본다. 복수를 한다 해서 이미 우리에게 생긴 상처는 나아지지 않는다. 마음의 정의인 용서를 통해 이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할 때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