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령
시청점 · 독서논술 7편
① 소크라테스의 변명
작성일 7.11
이 책은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았을 당시 행한 연설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의연한 태도와 사생관이 잘 나타나 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나를 고발한 사람들의 변설은 제 정신을 잃게 만들 정도로 현혹적이었으나, 정작 진실한 말은 단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나로부터 진실만을 들으실 것입니다. 나는 먼저 오래전부터 나에게 허위 사실을 뒤집어씌운 사람들과, 최근 나를 고발한 사람들에 대해 변론하고자 합니다.
거짓 소문을 퍼뜨린 사람들은 오랫동안 나를 중상모략해 왔습니다. 나는 이들이 언젠가 응분의 대가를 치를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이제부터 이 짧은 시간 동안 여러분의 마음속에 쌓인 터무니없는 오해와 선입견을 씻어내기 위해 변론하겠습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께 분명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나는 결코 대가를 바라고 지식을 파는 사람이 아니며, 사람들을 가르치고 돈을 받았다는 소문 역시 전부 사실무근이라는 점입니다. 현재 나의 극심한 가난이 이를 증명해 줍니다.
또한, 내가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게 된 것은 아마도 내게 작은 지혜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그 지혜의 본질을 델포이 신전의 신탁을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나는 신탁의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정치인, 예술가 등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일컬어지는 많은 사람을 직접 만나보며 나와 그들의 차이점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 차이란 바로 그들은 자신들이 실제로는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델포이의 신은 나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오히려 지혜를 뽐내는 자들보다 열등해 보이는 평범한 이들이 더 성실하고 진실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신탁을 시험하기 위해 무식한 상태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그들처럼 얄팍한 지혜와 무식을 동시에 지닐 것인가 고민한 끝에, 지금의 무지를 자각하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여러분, 나는 이러한 과정에서 많은 이들의 적대감을 사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자칭 애국자라는 멜레토스와 나를 고소한 자들에 대해 변론하겠습니다. 그들은 내가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나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성실한 체하며 함부로 나를 재판에 회부한 멜레토스야말로 참된 죄인이며, 그의 고발장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혹자는 내게 "소크라테스, 당신은 사형을 당할지도 모르는 길을 걸어온 것에 대해 후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가?"라고 물을지 모릅니다. 이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겠습니다. 죽음이나 그 밖의 위험을 두려워하여 자신이 지켜야 할 정의의 자리를 저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부끄럽고 합당치 못한 처사일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이 일을 지속해 온 것은 오직 신의 명령에 따르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께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나를 처형하는 것은 나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 자신을 해치는 결과를 낳을 뿐입니다. 나는 재판관들을 현혹해 부당하게 사형을 집행하려는 비겁한 행위야말로 진정으로 경계해야 할 큰 재앙이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정의를 저버린 비겁한 자들이 역사 속에서 훨씬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진정으로 사회의 부정과 불의를 막기 위해 투쟁하는 자라면 생명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께 예언 하나를 하고자 합니다. 내가 죽고 나면 머지않아 여러분에게 엄중한 징벌이 내려질 것입니다. 또한, 나는 죽음이 가치 있고 충분히 의미 있는 여정이 될 수도 있기에 죽음을 막연히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역시 나와 같은 시각으로 삶과 죽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울러 어떤 상황에서도 신이 의로운 자를 보살펴 준다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사형장으로 죽으러 가고, 여러분은 삶을 향해 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중 어느 편에 더 좋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지는 신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나의 생각 및 느낌] 죽음의 문턱 앞에서도 자신의 신념과 주장을 굽히지 않는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사형을 선고하려는 고발자들의 기세보다 훨씬 강력하고 굳건하게 느껴졌습니다. 내가 만약 소크라테스의 처지였다면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비겁하게 타협했을 텐데, 당시 소크라테스가 지녔던 확고한 사생관과 가치관은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참된 지혜를 일깨워주며 헌신했던 소크라테스가 정작 자신의 가족들에게는 가장으로서 소홀했던 태도는 아쉬움이 남으며, 개선되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 김나령
②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 — 계몽의 변증법
작성일 7.11
이 책의 저자들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으로서 근대성의 한계를 깊이 연구했다. 그들은 인류 역사가 나아가는 역설적인 행보를 날카롭게 통찰하고 이성의 비합리적인 측면을 직시했다. 이 책은 계몽이 오히려 사회적 광기를 낳았다고 비판하며,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로 나아가지 못하고 새로운 형태의 야만 상태로 빠져드는가?"라는 핵심 질문을 던진다.
- 계몽은 미신과 자연의 공포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고, 인간을 세상의 주인으로 세우려는 목표를 추구해 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초래된 폐해 역시 막대하다.
- 인간은 자연을 조작하고 지배하는 지식을 갈망했으며, 계몽은 도구화된 합리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내면적 주체성과 자의식의 흔적마저 지워버렸다.
- 자연 지배를 위한 핵심 전략은 자연의 신비로운 힘을 과학을 통해 무력화하는 것이다. 계몽은 과학적 사고에 대한 절대적 맹신을 심어주었으며, 이로 인해 지혜와 개념은 수학적 공식으로, 복잡한 인과관계는 기계론적인 규칙과 단순한 개연성으로 대체되었다.
- 계몽적 사유에 따르면 다양한 신화적 표상들은 모두 계량화할 수 있는 공통분모 아래 통합된다. 이처럼 모든 대상을 보편적 개념 아래 강제로 귀속시키고 획일화하는 방식은 대상 본질의 진리와 거리가 멀다.
- 주술의 단계에서는 인간과 대상(자연)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 반면 신화의 단계는 인간 주체가 자연 객체로부터 점차 독립하여 서로 상호 작용을 시작하는 시기이다. 계몽은 이러한 주객의 분리를 극단화하는 역설적이고도 모순적인 과정이다.
- 신화적 사유가 계몽적 사유로 이행함에 따라 자연은 생명력을 잃고 단순한 이용 대상(객체)으로 전락한다. 인간은 자연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량화된 사회 구조를 조직하지만, 자연 지배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사회 구성원에 대한 통제와 지배 역시 비례하여 강해진다. 결국 인간에게 자연은 수단적이고 유용한 도구로서만 존재하게 된다.
- 대중문화의 기획자들은 자신들의 사업을 가치중립적인 기술적 시스템으로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대중매체와 문화산업은 지배 집단의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생산해 내며 구성원들의 사유를 마비시키는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외견상 합리적으로 보이는 기술적 설명은 실제 경제적 불평등과 권력의 지배 구조를 은폐하는 도구로 작동한다.
- 현대 사회에서 노동 외의 여가 시간마저 문화산업이 대량 생산해 낸 소비재들로 채워진다. 대중문화와 예술은 자율성을 잃고 문화산업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이는 도구적 경제 이성이 전체주의적으로 팽창하여 나타난 필연적 결과이다.
[쟁점 파악] 계몽주의는 과학 기술과 실용적 지식을 제공해 인간 삶의 물질적 행복과 편리함을 증대시켰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기계적 사회 구조 속에서 인간에게 극심한 불안과 소외감을 안겨주었다. 이는 도구화된 이성의 이중적 특성에서 비롯된 것인데, 모든 대상을 계산적 가치로만 평가하면서 종국에는 인간조차 '효용성'에 따라 등급을 매기는 비인간적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이성의 도구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삶의 본원적 의미와 행복을 성찰하는 본래적 이성의 기능(사유 능력)과 과학 기술적 실용성을 추구하는 도구적 합리성이 균형 있게 보완되어야 한다. 또한 문화산업이 인간이 겪는 주체적 소외와 고통을 외면하고, 오직 상업적 상품으로서의 예술 생산에만 주력하는 현실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생각 및 느낌] 과학기술의 발전과 계몽적 사유가 인류에게 문명적 편리함과 실용적 지식을 비약적으로 늘려주었다는 주장에 깊이 동의합니다. 이는 우리가 합리적으로 예측하고 과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든든한 밑바탕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도구적 이성이 과도하게 비대해지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지적한 대로 사람의 존재 가치마저 효율성과 경제적 효용성으로 재단하는 것은 매우 반인륜적이고 비도덕적인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통찰처럼 현대 사회는 외적 가치와 규칙만을 앞세기보다, 인간 본래의 주체적 행복과 윤리를 성찰하는 이성이 서로 조화롭고 건강하게 어우러지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 김나령
③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 슬픈 열대
작성일 8.8
이 책의 저자는 구조주의 인류학의 선구자로 널리 알려진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이다. 그는 문화를 인간 사이의 소통과 교환을 매개하는 커뮤니케이션 체계로 분석했다. 『슬픈 열대』는 소위 '미개' 혹은 '야만'이라 불리는 타자의 시선을 거울삼아 서구 현대 문명의 오만함을 통렬하게 고발한 문명 비판서이다.
브라질 내륙 지방은 본래 원주민들의 고유한 문화적 터전이었으나, 영국계 철도 및 개척 회사에 토지 조차권이 부여되면서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점진적으로 강탈당했다. 내가 목격한 개척지의 신생 도시들은 고유성을 잃은 채 완전히 북유럽풍의 획일적인 양식으로 건설되어 있었다. 급격한 개발과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정돈되지 않았던 자연적 공간마저도 하루가 다르게 인위적인 바둑판식 도시 구조로 변모해 갔다. 개척 도시의 중심 격인 롱드리나는 어느덧 구획이 질서정연하게 잡힌 거대 주거형 도시로 팽창했다. 그러나 이 파괴적인 근대화 과정 속에서 토착 원주민들은 생존 기반을 상실한 채 고통을 겪고 있으며,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마저 급속히 잃어가고 있다. 원주민들은 낡은 정착 방식을 버리고 근대적 주거 체제 안으로 들어올 것을 강요받는다. 이 도시화는 소수의 투기꾼과 이주민에게는 막대한 특혜를 제공하지만, 원주민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박탈감과 절망을 안겨주며 문명의 새로운 하층민을 양산하고 있을 뿐이다. 문명의 중심인 연안 지방에서 1천 킬로미터 이상 멀리 떨어진 이 고원 도시는 급조되어 고립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도시의 급성장 이면의 모습은, 마치 이미 복구하기 힘들 정도로 훼손된 자연의 표면 위에 조잡하게 인공적인 땜질(풀칠)을 덧발라 놓은 것처럼 기괴하고 부자연스러웠다. 개발론자들이 꿈꾸는 거대한 식민화 사업이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규칙이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액체 상태(유동적 상태)가 선행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광활하고 다양한 특징을 지닌 고원 지대를 행정 편의주의에 따라 여러 구역으로 엄격히 재단해 나갔다.
만약 인류가 지금까지 더 잘사는 사회를 건설한다는 명목 하에 개발과 자연 파괴에만 몰두해 왔다면, 이제는 우리의 선조들이 시도했던 진정한 의미의 '사회 개혁'을 환기해야 하며 그러한 성찰의 용기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분명히 요구된다. 인류가 추구해야 할 참된 박애정신은, 서구인들이 원시적이고 가난하다고 치부한 부족 사회의 문화 속에서 외려 인류 공동의 본원적 모습을 발견하고 그들로부터 공존의 지혜와 교훈을 배우는 데 있다.
나아가 유럽인들이 '신세계'라 불리는 지역을 탐험하고 개척해 온 과정은, 실상 현지 생태계와 찬란했던 원주민 문화를 무참히 짓밟고 파괴해 온 역사적 원죄를 덮어써야 함을 의미한다. 인류 문명은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동시에 그것을 파괴하는 소모적 악순환을 반복해 왔다.
어떤 이들은 문명의 발전과 파괴가 어우러진 이 역사적 흐름이 허무하고 쓸모없는 낭비라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이루어 낸 역사적 문명은, 우주의 거대한 자연 속에서 그 어떤 피조물보다 가장 정교하고 완성도 높게 진화해 나가는 하나의 우주적 기계와도 같다. 따라서 나는 인류가 걸어온 기나긴 여정이 무가치하다고 보지 않으며, 문명이 갈등을 겪고 극복해 나가는 그 역동적인 과정 자체에 숭고한 존재 의의가 있다고 확신한다.
[쟁점 파악] 레비스트로스가 추구하는 구조주의 인류학 연구는 현상 이면의 보편적인 법칙을 규명하려는 형식적이고 기하학적이며 구조적인 경향성을 띤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사상은 이성적 사유를 중시하는 합리주의적 학풍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다양하게 흩어져 있는 문화와 사회적 관습(현상)들은 결국 인간 정신 밑바탕에 깔려 있는 보편적이고 무의식적인 정신적 구조(실체)가 겉으로 발현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는 사회적 삶과 문화를 소통의 규칙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체계적인 언어 규범(문법)처럼 엄격하게 취급한다.
그러나 이처럼 개별 사회를 구조의 법칙으로만 환원하게 되면, 개별 역사의 구체적 맥락과 주체적 실천을 도외시하여 역사의 고유성을 제대로 설명해 내지 못한다는 한계(특히 역사적 특수성 결여의 문제)를 안고 있으며, 이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류의 문명이 결코 단선적으로 진보해 나가는 것이 아니며, 서구 중심의 사고방식과는 다른 다원적인 주체적 질서가 엄연히 존재함을 밝혀 문명을 전체론적인 구조적 시각에서 입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나의 생각 및 느낌] 저는 역사를 하나의 고정된 수학 공식처럼 기계적으로 설명하려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관점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역사가 빚어내는 역동성과 개별 민족의 역사적 특수성은 어떠한 인류학적 공식으로 규격화하여 재단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역사가 정해진 구조의 반복에 불과하다면, 인류가 더 나은 내일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하는 실천적 행위나 '어제보다 진보하고 발전한 오늘'을 만들어 나가는 변화 가능성 자체를 전면 부정하게 됩니다. 이는 결국 인간의 역사 개혁 의지를 무너뜨리고 역사는 변하지 않는다는 식의 무기력한 체념주의로 빠져들 위험이 큽니다.
— 김나령
④ 타자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가?
타자는 나와 끊임없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적대적인 존재인가?
타자에 대한 인간의 날것 그대로의 본능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인류 역사를 통찰해 볼 때, 인간이 낯선 타자(집단)에 대해 얼마나 배타적이고 적대적으로 반응해 왔는지는 쉽게 증명된다. 우리가 이토록 타인에 대해 깊은 거부감과 적대감을 느끼는 원인은 무엇일까?
첫째, 타자가 나와 '다르다'는 사실 자체에서 오는 본능적 거부감이다. 인간은 본래 자기중심적이고 유아독존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어, 자신과 이질적인 특징을 가진 대상을 잠재적 위협으로 규정하고 적대시한다. 이러한 생경함은 본능적으로 안전에 대한 위협과 공포심을 자아내며, 이는 생존을 확보하려는 인류의 원초적인 방어기제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둘째, 타자가 지닌 가치관이 나의 기존 신념 체계와 충돌하여 내적인 혼돈과 불안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타자의 엄정한 관찰자적 시선에 내 주체적 삶이 발가벗겨지듯 노출되고 통제당함으로써 나만의 자유와 존엄을 박탈당할 수 있다는 실존적 불안감이 타자를 밀어내고 적대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원초적 불신을 극복하고 어떻게 공존의 길을 모색할 수 있을까?
첫째,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지위적 인정'을 받음으로써 불안을 상쇄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인정이란 헤겔의 주노예 변증법처럼 "내가 상대방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굴복시켜 받아내는 지배의 인정이다. 이 방식은 우월성을 확인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상대방을 정복하고 굴복시켜야 하므로 승자독식의 영토 전쟁을 끝없이 유발하며, 폭력과 억압의 악순환을 정당화한다는 윤리적 결함을 안고 있다.
둘째, 나와 타자 사이의 '보편적 공통점'을 발견하여 연대하는 방법이다. 모든 인간은 결국 고통을 느끼고 생명을 영위하려는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함으로써 차이점을 지우고 인류애를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식은 현실의 구체적 차이와 갈등을 얼버무려 추상적인 당위성에만 머무를 수 있다는 명백한 실천적 한계가 존재한다.
셋째, 타자성(Otherness)을 인정하고 그와의 진정한 연대를 구축하는 가장 근본적인 길은, 타자를 나의 잣대로 재단하거나 억지로 나와 같게 환원하려 들지 않고 '타자 그 자체로 고유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타자가 지닌 실존적 연약함과 한계(결핍)를 마주할 때, 지배하려는 충동 대신 보호하고 아끼려는 이타적인 책임감이 고개를 든다.
결론적으로, 타자의 결핍과 상처를 주체적으로 이해하고 깊이 공감할 때 비로소 우리는 상호 간의 진정한 이해와 소통의 창을 열 수 있다. 타자를 왜곡 없이 수용하고 그의 근본적 연약함에 따뜻하게 공감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마음속에 내재된 파괴적 폭력성에서 해방되어, 도덕적 책임을 실천하는 진정한 윤리적 주체로 거듭나게 된다.
— 김나령
⑤ 장 폴 사르트르 — 지식인을 위한 변명
학생 번호 6213
장 폴 사르트르는 일생 동안 시대와 타협하지 않고 불의에 저항하는 '참된 지식인'의 표상을 실천하고자 투쟁한 인물이다.
근대 이전의 전통 사회에서는 사회적 목표나 가치관의 설정은 지배 계층의 전유물이었고, 그 실현과 물리적 노동은 근로자 계층(피지배층)의 몫이었으며, 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실용 과학의 연구와 지식 생산은 주로 기술자 집단에게 위임되었다. 그러나 당시 '지식인'이라 자처하던 이러한 전문 기술자 집단은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할 뿐 진정한 지식인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은 지배 계층의 이데올로기적 영향 아래 놓여 현 지배 구조를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지식의 공급처 역할을 담당했다. 즉, 실용 지식을 갖춘 전문가 집단은 신흥 권력 계급인 부르주아지의 성장 경로와 궤를 같이하며, 그들의 사유재산을 보존하고 지배력을 확대하는 일에 동참했다. 나아가 부르주아지의 모든 착취와 지배 행동을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보편적 합리성'의 개념을 철학적으로 유포하는 데 앞장섰다.
이처럼 근대 초기의 이른바 '지식인'과 '철학자'로 불리던 자들은 오늘날 지식인들이 비판받는 사회적 부역 행위(권력 옹호)를 자행했다. 자본가(부르주아지) 계급은 자신들의 상업 및 경제 행위를 원활하게 지속하기 위해 법과 제도, 문화 영역 전반에 걸쳐 교묘한 통제 이데올로기를 구축했고, 당시의 철학자들은 이러한 지배 계급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충실한 하수인(유기적 지식인)으로 복무했던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역사에서 이정표가 된 '드레퓌스 사건'을 기점으로, 권력에 침묵하지 않고 공적 영역에서 저항하는 새로운 유형의 실천적 지식인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권력층들은 전문 지식을 갖추고 자신들을 향해 쓴소리를 뱉는 이들을 국가 체제를 흔드는 대단히 위험한 요주의 인물로 보았으며, 비판적 지식인 집단을 국가 발전을 사사건건 가로막고 반대를 위한 반대만 일삼는 적으로 간주했다. 지식인들이 지배 질서의 위선적인 단면을 날카롭게 고발하고 대안을 제시하며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은 지식인들이 저항적 태도를 버리고 다시 기술 관료의 자리로 순응하도록 각종 억압과 사법적 처벌, 회유를 통해 강요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진정한 지식인이란 자신이 사회화 과정을 통해 철저히 교육받고 주입받은 지배 질서의 이데올로기적 모순을 주체적으로 폭로하고, 지배 권력의 부당한 하수인(부역자)이 되기를 거부하며, 나아가 기술자적 권한을 넘어 자신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어 보이는 사회적 불의와 억압(타자의 고통)에 기꺼이 참여하고 목소리를 내는 존재이다. 물론 기득권의 탄압과 탄핵 속에서 고독하게 이 길을 걷는 것은 결코 순탄치 않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한 사회에서 단순히 실용 지식을 갖춘 기술자가 진정한 실천적 지식인으로 변모하고 각성하게 되는 계기는 모순된 사회적 갈등을 직접 대면하면서부터이다. 즉 지식인으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자신이 수행하는 학문 및 기술의 탐구가 실상 지배 계급이 교묘하게 심어놓은 이데올로기적 허위의식과 치열하게 갈등하고 대립하고 있음을 뼈저리게 깨달아야만 한다.
더불어, 참된 지식인이 제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권력에 야합하는 현상은 비단 개인의 도덕적 결함 탓만은 아니며, 지식인을 도구화하고 감시하는 억압적 사회 구조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면이 크다. 따라서 우리는 지식인 개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난만을 일삼기보다, 그들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유로운 사회적 분위기를 구축하는 데 동참해야 한다.
[쟁점 파악] 사르트르는 보편 지식을 가진 지식인이란 모름지기 피지배 계급인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의 억압된 권리를 대변하고 고발해야 한다고 열렬히 주장했다.
반면, 포스트모던 사상가인 미셸 푸코는 1968년 5월 혁명(68혁명)의 경험을 분석하며, 현대 사회에서 더 이상 민중을 위해 가르치고 계몽하려 드는 과거의 군림하는 '보편적 지식인'은 필요하지 않다고 보았다. 오히려 지식인이 민중의 목소리를 독점하고 대변하려는 시도가 또 다른 형태의 권력 작용이자 억압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전문적으로 활동하는 국지적 영역에서 사법, 의료, 학문 체계의 숨겨진 지배 논리를 폭로하는 새로운 형태의 '특수한 지식인(Specific Intellectual)'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역시 포스트모던적 시각에서 거대 담론의 붕괴를 선언하며, 인류 전체의 보편 진리와 유토피아적 미래를 선동하던 지식인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고 보았다. 이 두 포스트모던 사상가의 공통된 결론은, 과거의 획일화되고 위선적일 수 있는 보편 지식인 모델에서 탈피하여 각 영역에서 독립적으로 저항하는 다원적인 실천적 대안을 새롭게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생각] 저는 오늘날의 현대 사회가 다원적이고 파편화된 후기 근대성(탈근대) 시대로 이행했기 때문에, 인류 보편의 진리와 절대적 정의를 독점적으로 구현하려 했던 사르트르식의 '보편 지식인' 개념을 현대에 그대로 복제해 적용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푸코나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이 적절하게 짚어낸 바와 같이, 오늘날의 민중(대중)은 인터넷과 고도의 정보화를 거치며 굳이 지식인이라는 엘리트 계층을 대변인으로 세우지 않더라도, 다양한 채널을 통해 스스로 정보를 획득하고 조직화하여 주체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역량과 힘을 충분히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 김나령
⑥ 다수의 의견이 진리인가?
다수의 동의는 어떤 진리를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 자체로 권위를 지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다수의 지지를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이성적이고 바람직함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스피노자는 진리를 하나의 실재로 파악하며 개인적인 체험을 중시했는데, 이 관점에서도 다수의 동의는 진리 획득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절대적이고 영원한 규범으로서의 진리를 아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무엇을 진리로 받아들일지를 결정하는 패러다임은 결국 연구자 집단이 정하게 되는데, 연구자들은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이론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발전시켜 나간다. 그렇다면 이 경우 다수의 동의란 진리의 기준이라기보다는 효율성과 이론의 생산성에 관련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문화에 따라 진리가 변화한다는 것은 결국 진리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집결한 다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여론을 형성하여 큰 권력을 행사하는데, 이는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다수의 어리석음이 폭력을 낳고 이에 반대하는 소수의 저항이 무시되었던 사례를 역사 속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다. 여론은 선입견이나 감정에 근거하는 경우가 많고, 사람들은 다수와 함께 있다는 안도감 때문에 쉽게 여론에 휩쓸린다. 다수의 의견은 권력 체제에 의해 선동·조종될 수 있으므로, 실질적인 개인의 자유가 상당 부분 제한될 위험도 있다.
실제로 지도자의 임무가 국가를 발전시키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라면, 정치가는 때로 여론에 이끌려가기보다 여론을 주도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다른 시민들보다 선(善)을 더 잘 알고, 권력욕에 빠지지 않으며, 모두에게 공정한 '철인왕'이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점이다. 철학사적으로 볼 때 '여론'이나 다수의 의견은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 왔지만, 현대의 정치의식은 플라톤식의 역할 분배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소수가 대중으로부터 모든 권력을 빼앗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법이 강자와 소수 특권층에 의해 남용되거나 왜곡되지 않으려면 일반의지의 실행이 필수적이며, 다수에 의해 정치 형태가 결정될 때 폭력과 불의도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 역시 같은 맥락에서 나온다.
또한 법이 채택되는 과정에서 소수의 의견이 온전히 수용되지 못하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 루소는 채택된 법에 반대하는 이들조차 그 법에 복종함으로써만 자신의 자유를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은 모든 시민을 존중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이상과 맞닿아 있으며, 민주주의에 위험이 존재함에도 현실적으로는 최선의 선택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효율성의 문제와 진리의 문제는 별개이지만, 여론이 더 바람직한 시민의 힘으로 자리 잡으려면 시민 각자가 권력 기구의 구체적인 실행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갖추고, 이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비판 의식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민주주의가 다수의 동의를 기반으로 하는 이상 우리는 절대적 진리에 지나치게 집착하기보다, 다수의 동의가 더 정의롭고 평화적인 결론에 이를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옛날에는 많은 사람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었던 것처럼, 다수의 의견이 무조건 진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책에서 말한 것처럼 다수의 동의가 정의롭고 평화적인 결론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하며, 정치가가 옳은 선택을 하지 못하거나 무자비한 통치를 한다면 그때는 이를 비판할 수 있는 깨어 있는 다수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김나령
⑦ 라인홀드 니버 —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라인홀드 니버는 생전에 미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떨친 세계적인 인물이다. 목사로 활동하다 기독교 윤리학 교수가 되어 1960년 은퇴할 때까지 계속 재직했다. 처음에는 자유주의적 사회복음을 이상으로 삼았으나, 1930년대 대공황의 그늘을 보면서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니버는 이후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똑같이 비판하였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는 1929년 세계 대공황 발발 이후 자본주의가 가장 극심한 위기에 봉착했던 1930년대 초반에 출간되었다.
개개인은 행위를 결정할 때 다른 사람의 이익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도덕적이다. 개개인은 사회적 상황을 공정하고 객관적인 잣대로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이기주의적 요소를 스스로 정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들이 모여 이룬 집단은, 개인이 사적인 관계에서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심한 이기주의를 드러낸다.
집단의 도덕이 개인의 도덕보다 열등한 이유는, 집단적 충동이 결국 개인들의 이기적 충동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도덕주의자들의 낙관을 비판한다.
현대 도덕가들이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우리가 겪는 사회적 어려움이 자연과학의 발전 속도에 사회과학이 보조를 맞추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여긴 점이다. 오늘날의 교육자들 역시 모든 시대의 합리주의자들처럼 삶 속 이성의 기능을 지나치게 신뢰하지만, 역사와 현실 세계는 오히려 이성적이지 않은 힘들에 의해 움직여 왔다.
사회과학자들이 선호하는 방법은 '조정'이지만, 소외된 집단이 조정만으로 사회 안에서 충분한 정의를 얻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권력 불균형에서 비롯된 사회적 갈등은, 그 불균형이 지속되는 한 결코 해소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회학자는 많지 않다. 인간 역사에서 사회는 정치적이다. 즉 집단 사이의 관계는 힘에 의해 결정되며, 사회적 각성과 도덕적 선의지의 증가가 이를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어도 갈등 자체와 그 야만성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사회정의와 항구적인 평화는 현실을 넘어서 있는 이상이다. 앞으로 다가올 세기, 인류의 근본 과제는 단 하나의 사회 전략이 아니라 여러 수준의 도덕적 공동 작업이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강제력이 최대한 비폭력적으로 작동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다.
[쟁점 파악] "집단 이기주의와 사회적 갈등은 끝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니버의 견해에 동의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니버가 지나치게 비관주의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 김나령
박나은
강동점 · 철학논술 3편
① 오늘날에도 철학은 가치가 있는가?
작성일 25.12.19
현대 사회는 생산성과 기술적 경쟁력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철학적 사고의 특징은 숙고와 신중함이므로 모든 것이 바삐 돌아가는 현대생활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철학은 가치가 있는가?
철학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효율성과 생산성을 숭배하는 문화 속에서 철학적 사고는 더욱더 절실하다. 왜냐하면 기술의 발전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끊임없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과학주의자들은 자유의지, 세계의 시초, 영혼의 불멸과 관련된 질문까지 과학이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과학은 수많은 분야에서 해결책을 제시함과 동시에 새로운 문제를 유발하고 있다. 과학은 반성 작업을 통해 연구의 한계를 스스로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따라서 철학은 과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할 수 있는 방향을 제공해 줄 의무를 갖는다. 과학은 삶에 답을 줄 수는 없지만, 그것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하고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철학적 사유이다.
마르크스는 명상만 하는 철학자들의 모습을 비판하고 영원한 진리를 탐구하는 형이상학을 인간의 혁명을 추구하는 역사학으로 대치시켰다. 그는 인류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만을 제기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히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기에 자신이 해결할 수 없고 과학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들을 끊임없이 제기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형이상학적인 동물이며 형이상학은 인간에게 약속할 수 없는 유혹이다.
철학에 있어 과학의 한계를 구분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 철학을 지혜와 진리의 추구라고 정의한다면 철학은 시대를 갖고 있지 않으며 인간이 이성과 의식을 갖고 있는 한 계속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철학 없이 살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철학은 우리가 더 잘 살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즉, 철학은 우리가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가치가 있는 것이다.
기술과 과학이 맹위를 떨치는 오늘날 철학의 위치가 많이 위축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성과가 풍부하고 과학적 지식이 효율적이라 해도, 그것이 삶과 그 목적 자체를 묻는 철학을 대신할 수는 없다.
— 박나은
② 노동은 자아실현에 필요하다
작성일 25.01.30
고대 노예의 일하는 모습과 공장에서 일하는 현대 노동자의 모습을 보면서 노동을 자유와 연관 지어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노동은 정신적·육체적 구속을 의미하기 마련이다. 노동이란 말의 어원은 속박과 고문이다. 어원적으로 일은 지겹고 고통스러운 활동을 지칭한다. 프랑스어로는 노동을 travail라 하며, travail의 어원은 사나운 황소나 말의 발바닥에 편자를 박을 때 소와 말을 묶어놓는 기구, 즉 다루기 힘든 동물을 속박하기 위해 만든 라틴어의 tri-palium에서 유래한다.
결국 본래의 의미에서 볼 때, 노동이란 냉혹한 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통스러운 노력을 해야 하는 인간의 예속 상태와 연결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자연의 적대적인 힘을 정복하고 그것을 인간의 수단으로 바꾸는 것도 노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자연 속에서 인간은 이방인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노동을 해야 한다. 즉, 노동은 처음에는 자연이 충족시켜 줄 수 없는 욕구들을 채우기 위한 생존 수단이었지만 이후 자연뿐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를 바꾸는 역할을 하게 된다.
집단적인 측면에서는 물론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도 노동을 거치지 않고 얻은 성과는 결코 자아실현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따라서 노동 없이는 자아실현이 불가능하고, 노동이 있어야만 자아실현이 가능하다. 처음 이 글의 제목인 '노동은 자아실현에 필요하다'라는 제목을 보고 노동과 자아실현이 무슨 상관인지 잘 몰랐다. 그러나 책을 읽어보니 노동은 나의 잠재력을 발휘하여 자아를 실현하는 방법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노동은 인간이 하는 경제 활동이다. 공부란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다. 이 노동과 공부 사이에 과연 공통점이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공통점은 무언가를 배우고 익히고, 그리고 생각하는 것인 것 같다. 노동과 공부 모두 배워야 할 수 있고, 익혀야 하고, 생각하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점에서는 모두 같다고 볼 수 있다.
— 박나은
③ 우리에게 복수할 권리가 있는가?
작성일 25.02.13
복수를 한다는 것은 타인이 저지른 잘못이나 범죄에 대한 죗값을 치르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복수란 이유 없는 단순한 폭력이 아니며 상대방이 내게 행한 나쁜 짓을 되돌려줌으로써 균형을 되찾고 스스로 정의의 이름으로 형벌을 내리겠다는 의도를 내포한다. 내가 당한 것과 똑같은 피해를 상대방에게 입힘으로써 보상받을 수 있다는 마음이 복수에는 내포되어 있다.
외관상 정의로운 처벌과 복수는 겉으로 보기엔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복수를 하는 것이 정의로운 행위를 하는 것이라 착각하기 쉽다. 왜냐하면 정의와 복수를 유사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처벌이란 개념 때문일 것이고, 실제로 이 처벌의 문제에 있어 정의와 복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적 차원에서 처벌이 이루어지느냐 아니냐에 따라 가해자에 대한 동일한 처벌이 의로운 법이 될 수도 있고 끔찍한 범죄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복수와 합법적인 처벌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첫째, 개인의 만족감. 둘째, 죄와 벌 사이의 시간적 간격. 이 두 가지 기준을 통해 복수와 합법적인 처벌은 구분된다. 복수는 주로 무력적인 힘을 사용하는 데 반해 법은 합법적인 제한을 적용한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복수의 정신은 근본적으로 폭력적이다. 반면 법은 복수할 수 있는 적당한 권리를 제공하지만 그 이상은 금지함으로써 상호 폭력을 한정한다.
자신이 먼저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혔다 해도 상대방의 복수에 의해 자신이 흘린 피를 당연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없다. 따라서 그로부터 끝없는 새로운 갈등과 폭력이 시작된다. 즉, 복수는 끊임없이 새로운 복수를 만들어내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는 반복과 악순환의 구조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것에 한계를 짓는 자가 필요한데 이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법이다.
한편 용서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용서는 수양과정으로 여겨질 만큼 어려운 과제일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우리에게 복수할 권리가 없다고 본다. 복수를 한다 해서 이미 우리에게 생긴 상처는 나아지지 않는다. 마음의 정의인 용서를 통해 이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할 때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 박나은
박건율
강동점 · 창작·수기 4편
① 지우개
2015.9.26 (6세반) · 시
지우개는 맨날 무언가를 지운다.
지우개는 쓰면 쓸수록 점점 닳아서 죽는다.
하지만 다 쓴 지우개 가루를 꾹꾹 뭉치면
말랑말랑한 새 지우개로 완벽하게 환생한다.
— 박건율
② 마이클 조던 이야기
마이클의 형 래리는 학교 농구 선수였다. 어느 날 형이 동생 마이클과 농구 시합을 하고 난 뒤, 땀에 흠뻑 젖은 형의 모습이 멋있어 보여서 마이클도 농구를 시작했다. 마이클은 시합을 할 때마다 형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까지 마이클은 키가 작은 편이었다. 그래서 남들보다 먼저 아침 일찍 나와 혼자 농구 연습을 하며 실력을 키웠다. 하루도 빠짐없이 드리블과 패스 연습을 매일 5번씩 했고, 아침을 챙겨 먹으며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갔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실력이 좋은데도 키가 작다는 이유로 농구부에 뽑히지 못했다. 마이클은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더 열심히 연습했고, 2년 동안 키가 훌쩍 자랐다.
마침내 키가 190cm가 되자 마이클은 고등학교 농구팀에 뽑혔다. 팀에 들어가자마자 득점 기록을 갈아치우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에는 올림픽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 농구는 세계 최고 수준이어서, 그 안에서 마이클의 실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였다. 마이클은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계속 슛 연습을 했고, 결국 대회가 끝날 무렵에는 공을 잘 넣는 선수로 성장했다.
처음에는 3점 슛이 잘 들어가지 않아 따로 연습을 거듭했다. 다시 올림픽이 찾아왔을 때는 3점 슛과 미들슛을 정확히 넣고 수비까지 잘 해내며, 훗날 "농구 황제"라 불리게 되었다.
— 박건율
③ 예쁘지 않아도 스타가 될 수 있다 —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12월 19일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여배우들이 춤추는 모습을 보던 스트라이샌드는 자기도 여배우가 되고 싶다고 엄마에게 말했다. 하지만 엄마는 못생겨서 안 된다고 했다. 여배우는 예뻐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트라이샌드는 입술이 도톰하고 턱이 뾰족한 얼굴이었다. 엄마는 스트라이샌드가 다른 직업을 갖기를 바랐고, 그렇게 냉정하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딸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도 "못난이"라고 놀림을 받곤 했다.
그래도 스트라이샌드는 연기를 배우는 학교에 들어가 극단을 찾아다니며 오디션을 봤다. 목소리는 좋다는 평을 들었지만 얼굴 때문에 번번이 떨어졌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일주일에 일곱 번씩 오디션을 보러 다녔고, 떨어져도 끝까지 버텼다.
"목소리가 좋으니 가수를 하면 되겠다"고 생각한 스트라이샌드는 꿈을 가수로 바꾸었다. 가수 오디션에 합격하고 목소리가 좋다는 칭찬을 받았으며, 무대에서 계속 노래하며 대회에서 우승도 했다. 첫 앨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앨범》이 나오자마자 큰 인기를 끌었고, 그 앨범으로 최우수상까지 받으며 정식 가수로 자리 잡았다. 한때는 "마녀의 코"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스트라이샌드는 20세기 미국을 빛낸 최고의 가수 중 한 사람이 되었다.
— 박건율
④ 축구선수 박지성 — 강철 체력과 끝없는 연습으로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가 되다
2025.4.26(금)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우리나라는 처음으로 월드컵 4강에 올랐다. 그때 가장 활약이 컸던 선수가 바로 박지성이다. 16강전에서 넣은 골로 단숨에 스타가 되었다.
4강에 오르려면 폴란드, 미국, 포르투갈을 적어도 한 번씩은 이겨야 했다. 포르투갈과 붙었을 때는 한 번은 비기고, 한 번은 운 좋게 우리나라가 이겼다. 그때는 박지성을 응원하는 노래까지 나올 정도였다.
박지성은 어릴 때 해가 질 때까지 골목에서 축구공만 쫓아다녔다. 그런데 또래보다 키도 작고 몸집도 작아서 아버지가 걱정을 많이 했다. 그래서 하시던 일을 그만두고 정육점을 열기도 했다. "개구리를 먹으면 키가 큰다"는 말을 듣고는 산에서 개구리를 잡아다가, 제대로 손질할 줄도 몰라 그냥 삶아서 내장 냄새가 심한데도 꾹 참고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성장한 뒤에도 시련은 있었다. 크게 다쳐서 7개월이나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지만, 치료를 마치고 다시 축구장으로 돌아왔다.
상대의 공을 귀신같이 빼앗아 오는 모습 때문에 "유령"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지치지 않는 체력 덕분에 "산소탱크", "두 개의 심장을 가진 선수"라고도 불렸다.
소감: 정말 개구리를 먹으면 키가 크는지 궁금했다. 나도 한번 개구리를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박건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