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저자는 레비스트로스로 구조주의 이론의 선구자로 유명하며, 그는 문화를 커뮤니케이션 체계로 보았다. 「슬픈 열대」는 '야만'의 시각으로 써내려간 현대문명 비판이다.
<주요내용>
원래 고유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브라질은 영국계의 회사로부터 조차권을 얻으며, 영토를 서서히 빼앗겼다. 내가 본 새 도시들은 완전히 북유럽식이었다. 점점 도시화 되며, 미완성의 공간 조차 나날이 도시구조를 획득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이제 롱드리나는 거주지역을 갖춘 체계 잡힌 도시로 변화하였으며, 이런 도시화 과정중 원주민들은 고통 받으며 점차 그들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중이다. 그들의 집은 도시화 되기로 강요받고 있으며, 이것은 어떤 사람에겐 특혜를 주며 어느 이들에게는 실망을 주어가며 미래의 주민들을 형성시켜 나간다. 주의 작은 수도인 그곳은 연안 지방에서 1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버려지며 두절된 상태로 지내고 있다.
그 지나치게 자라있는 모습은 오히려 훼손된 표면에 조잡한 풀칠을 덧붙여 주는듯하다. 그들이 꿈꾸는 거대한 사업을 꾸리기 위해서는, 오히려 액체상태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고원형의 땅덩어리를 갖가지 지역으로 규정지었다. 지금까지 우리들 인간이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든다는 일에만 몰두했다면, 선조들의 사회개혁을 위한 용기는 우리들에게도 의당 있을것이다. 인류의 박애정신이란, 가장 빈곤한 부족사회에서 우리의 모습을 재확인하고, 교훈을 얻는것이다.
또, 우리들 유럽인으로서 신세계의 중심부를 탐험하는 일이란, 그것을 파괴한 죄를 우리가 덮어써야하는것을 의미한다. 인류는 문명을 만들고 파괴하는 과정을 계속 반복해왔다. 어떤이들은 이것이 쓸모없다고 느낄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역할은 다른 어떤것보다 더욱 정교함에까지 도달해 있는 하나의 기계와 같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쓸모없다고 생각하지 않고, 이 과정 자체가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쟁점 파악>
레비스트로스가 지향하는 인류학의 연구는 형식적이고, 구조적인 경향을 따른다. 그래서 그는 합리주의자로 규정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다양한 사회 현상은 무의식적 실체가 의식적으로 표현된 것이며, 그는 사회과정을 하나의 문법으로 취급할 것이다. 그래서, 구조를 벗어나면, 설명을 하지 못하므로, 적절한 설명을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특히, 특수성에 대해) 그는 우리의 사고방식과 다른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전체로 파악하려 했다.
[나의 생각 및 느낌 (작성자 성찰)]
저는 레비스트로스의 의견과 달리 역사를 하나의 공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역사의 특수성은 그 하나의 공식으로 설명하는것이 불가능하며, 그럼 '어제보다 진보한 오늘'이라는 말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체념주의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구조주의 인류학의 선구자로 널리 알려진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이다. 그는 문화를 인간 사이의 소통과 교환을 매개하는 커뮤니케이션 체계로 분석했다. 『슬픈 열대』는 소위 '미개' 혹은 '야만'이라 불리는 타자의 시선을 거울삼아 서구 현대 문명의 오만함을 통렬하게 고발한 문명 비판서이다.
<주요 내용>
브라질 내륙 지방은 본래 원주민들의 고유한 문화적 터전이었으나, 영국계 철도 및 개척 회사에 토지 조차권이 부여되면서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점진적으로 강탈당했다. 내가 목격한 개척지의 신생 도시들은 고유성을 잃은 채 완전히 북유럽풍의 획일적인 양식으로 건설되어 있었다. 급격한 개발과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정돈되지 않았던 자연적 공간마저도 하루가 다르게 인위적인 바둑판식 도시 구조로 변모해 갔다. 개척 도시의 중심 격인 롱드리나는 어느덧 구획이 질서정연하게 잡힌 거대 주거형 도시로 팽창했다. 그러나 이 파괴적인 근대화 과정 속에서 토착 원주민들은 생존 기반을 상실한 채 고통을 겪고 있으며,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마저 급속히 잃어가고 있다. 원주민들은 낡은 정착 방식을 버리고 근대적 주거 체제 안으로 들어올 것을 강요받는다. 이 도시화는 소수의 투기꾼과 이주민에게는 막대한 특혜를 제공하지만, 원주민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박탈감과 절망을 안겨주며 문명의 새로운 하층민을 양산하고 있을 뿐이다. 문명의 중심인 연안 지방에서 1천 킬로미터 이상 멀리 떨어진 이 고원 도시는 급조되어 고립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도시의 급성장 이면의 모습은, 마치 이미 복구하기 힘들 정도로 훼손된 자연의 표면 위에 조잡하게 인공적인 땜질(풀칠)을 덧발라 놓은 것처럼 기괴하고 부자연스러웠다. 개발론자들이 꿈꾸는 거대한 식민화 사업이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규칙이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액체 상태(유동적 상태)가 선행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광활하고 다양한 특징을 지닌 고원 지대를 행정 편의주의에 따라 여러 구역으로 엄격히 재단해 나갔다.
만약 인류가 지금까지 더 잘사는 사회를 건설한다는 명목 하에 개발과 자연 파괴에만 몰두해 왔다면, 이제는 우리의 선조들이 시도했던 진정한 의미의 '사회 개혁'을 환기해야 하며 그러한 성찰의 용기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분명히 요구된다. 인류가 추구해야 할 참된 박애정신은, 서구인들이 원시적이고 가난하다고 치부한 부족 사회의 문화 속에서 외려 인류 공동의 본원적 모습을 발견하고 그들로부터 공존의 지혜와 교훈을 배우는 데 있다.
나아가 유럽인들이 '신세계'라 불리는 지역을 탐험하고 개척해 온 과정은, 실상 현지 생태계와 찬란했던 원주민 문화를 무참히 짓밟고 파괴해 온 역사적 원죄를 덮어써야 함을 의미한다. 인류 문명은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동시에 그것을 파괴하는 소모적 악순환을 반복해 왔다.
어떤 이들은 문명의 발전과 파괴가 어우러진 이 역사적 흐름이 허무하고 쓸모없는 낭비라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이루어 낸 역사적 문명은, 우주의 거대한 자연 속에서 그 어떤 피조물보다 가장 정교하고 완성도 높게 진화해 나가는 하나의 우주적 기계와도 같다. 따라서 나는 인류가 걸어온 기나긴 여정이 무가치하다고 보지 않으며, 문명이 갈등을 겪고 극복해 나가는 그 역동적인 과정 자체에 숭고한 존재 의의가 있다고 확신한다.
<쟁점 파악>
레비스트로스가 추구하는 구조주의 인류학 연구는 현상 이면의 보편적인 법칙을 규명하려는 형식적이고 기하학적이며 구조적인 경향성을 띤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사상은 이성적 사유를 중시하는 합리주의적 학풍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다양하게 흩어져 있는 문화와 사회적 관습(현상)들은 결국 인간 정신 밑바탕에 깔려 있는 보편적이고 무의식적인 정신적 구조(실체)가 겉으로 발현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는 사회적 삶과 문화를 소통의 규칙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체계적인 언어 규범(문법)처럼 엄격하게 취급한다.
그러나 이처럼 개별 사회를 구조의 법칙으로만 환원하게 되면, 개별 역사의 구체적 맥락과 주체적 실천을 도외시하여 역사의 고유성을 제대로 설명해 내지 못한다는 한계(특히 역사적 특수성 결여의 문제)를 안고 있으며, 이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류의 문명이 결코 단선적으로 진보해 나가는 것이 아니며, 서구 중심의 사고방식과는 다른 다원적인 주체적 질서가 엄연히 존재함을 밝혀 문명을 전체론적인 구조적 시각에서 입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나의 생각 및 느낌 (작성자 성찰)]
저는 역사를 하나의 고정된 수학 공식처럼 기계적으로 설명하려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관점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역사가 빚어내는 역동성과 개별 민족의 역사적 특수성은 어떠한 인류학적 공식으로 규격화하여 재단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역사가 정해진 구조의 반복에 불과하다면, 인류가 더 나은 내일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하는 실천적 행위나 '어제보다 진보하고 발전한 오늘'을 만들어 나가는 변화 가능성 자체를 전면 부정하게 됩니다. 이는 결국 인간의 역사 개혁 의지를 무너뜨리고 역사는 변하지 않는다는 식의 무기력한 체념주의로 빠져들 위험이 큽니다.